475세대가 정치지형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는 물론 당선자 비서실마저 475세대 일색이다. 바야흐로 ‘475’시대다. 하지만 경제정글 속 475세대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승진은 여의치 않고 퇴출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젠 기댈 언덕조차 찾기 어렵다. ‘사오정’‘오륙도’의 비애(悲哀)가 남 일 같지 않은 요즘이다. 475세대가 이명박 시대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2008년 벽두(劈頭). <이코노미21>은 경제정글에서 ‘고군분투’ 중인 475세대의 대표주자 대기업 부장 100명의 속내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475세대, 국정 중심축 급부상 경제정글선 ‘퇴진속도’ 빨라지는 추세
386세대 부장 “임원승진 기대” 475세대 부장 “퇴진 후 삶 고민”
ㅎ대기업 최 부장. 58년 개띠인 그는 77학번이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캠퍼스를 다녔다. 말하자면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약진한 475세대(50년대 태어나 70년대 대학을 다닌 40~50대)다. 입사일은 85년 12월. 직장생활만 벌써 20여년째다.
연차로 보면 임원명함을 들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 하지만 그는 불과 3년 전 부장진급에 성공한 ‘늦깎이’ 부장이다. 대리에서 두 번, 과장 때 세 번 연거푸 물을 먹었기 때문이다. 몇몇 동기생들은 임원배지를 달았지만 그는 “오래 사는 게 최고”라며 너스레를 떤다.
‘늦깎이’ 최 부장의 절절한 사연
신입사원 시절, 그의 눈에 비친 부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끗발도 세고 재량도 많았다. 회식비를 모두 전담할 정도로 자금력 또한 풍부했다. 하지만 최 부장은 그렇지 않다. 회사조직체계가 팀제로 바뀐 후 부장 위치가 예년만 못하다(상자기사 참조). 팀장이 임원인 탓에 결정권이 많지 않다. ‘부장만 되면 생활이 괜찮아지겠지’라는 기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의 학원비, 각종 대출금을 지불하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얼마 남지 않은 퇴직도 걱정거리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평균 정년은 54세가량. 50줄에 막 접어든 그의 정년은 대략 4~5년 남았다. 그래서 임원승진 여부, 퇴직 후 삶에 대한 근심이 부쩍 늘고 있다.
최 부장은 요즘 임원승진에 실패한 최고참 부장선배를 보며 미래를 그린다. ‘그래도 나는 (승진)가능성이 있겠지’라는 기대감에 가끔 임원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다 영 내키지 않으면 퇴직 후를 대비, 취업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린다.
그는 “대기업 부장은 과장, 차장 시절과 너무도 다르다”며 “인생이 다시 시작된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른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어 “대기업 부장이 된 후 인생을 다시 배우는 것 같다”고 전했다. 대기업 부장 직함을 가지고 있는 어느 중년 남성의 육성 고백은 이처럼 절절하다.
부장 연령대, 386세대 · 475세대 공존
대기업 부장은 말 그대로 부(部)의 장(長)이다. 부서를 통솔하고 조직업무를 총괄한다. 박종국 한화그룹 차장은 “회사 조직기구상 라인 또는 스탭 관리업무를 담당하는 책임 직위”라고 했다. 한미향 포스코 과장은 “부장의 역할은 부서에 분장된 업무를 총괄수행하며 소속직원을 지휘 감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총이 실시한 ‘승진관리 실태조사’(2005)에 따르면 부장의 평균 연령은 대략 46.0세. 386세대와 475세대가 공존하는 연령대다(표 참조). 외환위기 이후 붕괴된 한국경제를 온몸으로 지탱해온 중년층, 중산층이기도 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승진이 빠른 부장은 대개 40대 초반, 느린 사람은 50대 중반”이라며 “가장 넓은 연령 폭을 가지고 있는 직급이 부장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때문에 같은 부장이라도 행동양식 등이 천차만별”이라며 “임원승진을 위해 사내정치를 서슴지 않는 유형도 있고, 퇴직 후를 겨냥해 투자에 전념하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연령 폭이 넓다고 누구나 부장에 오를 순 없다. 부장은 떼놓은 당상이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전체 직원(12만명) 중 부장이 2천~2500명으로, 2%에 미치지 못한다. LS전선과 한화그룹은 각각 6.0%, 3.0%에 불과하다. C&그룹의 경우, 전체 직원수 4500명 가운데 70명(1.5%)만 부장이다. 포스코그룹의 부장수(직책 기준시)는 아예 전체 직원수 1만7444명의 1%도 넘지 못한다.
그만큼 부장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무엇보다 평균 15.8년은 꾹 참고 기다려야 한다(파트2 참조). 삼성그룹의 부장진급 가능 햇수는 18년에 달한다. SK그룹은 3년(평사원)-5년(대리)-5년(과장)-3년(차장) 등 총 16년이다. 현대차그룹과 포스코그룹 또한 최소 16~20년의 경력을 인정받아야 부장에 오를 수 있다.
포스코 부장, 전체 직원의 0.9%에 불과
하지만 ‘경력’을 쌓았다고 부장행(行) 티켓이 절로 발부되는 것은 아니다.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윗사람이 매긴 인사 평점 역시 남부럽지 않아야 한다. 소정의 자격을 갖춰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진그룹의 경우, 부장이 되려면 사내영어자격증 등 몇몇 자격증을 따야 한다. 이뿐 아니다. 부장승진율은 유독 낮다. 경총에 따르면 ‘차장→부장 승진율’은 33.6%에 불과하다. 이는 ‘대졸신입→대리’ 57.4%, ‘대리→과장’ 45.4%보다 턱없이 낮은 수치다.
힘겹게 부장에 올라가도 ‘고생길’은 계속 이어진다. 첩첩산중과 같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부장의 근심 걱정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기업 부장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부장 업무가 때론 부담스런 게 고민 아닌 고민이다.
A그룹 ㄱ부장은 “조직융화 및 통솔력 발휘에 대한 부담감이 크다”고 호소했다. B그룹 ㄴ부장은 “잘못된 판단으로 임원과 직원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기 십상”이라고 답했다. 박진희 코이드 부장의 답변은 보다 구체적이다. “조직의 목표에 들어맞게 부서를 이끌고 있는가, 부서원의 팀워크를 어떻게 이끌어내 성과로 연결할 것인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는 선배의 모습이 무엇인가 등…. 막상 부장에 오르니 고민이 수없이 많다.”
업무부담 뿐 아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마땅치 않다는 점도 부장들의 고민거리 중 하나다. 부장 다음 직급은 당연히 임원. 그러나 임원승진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임원수가 워낙 적기 때문이다. 포스코그룹의 임원수는 전체 직원 1만7444명 가운데 47명(0.26%) 뿐이다. 한화그룹과 현대아이파크몰도 각각 1.5%, 3.5%에 불과하다. KT 계열 코이드의 등기임원은 4600명의 직원 중 단 2명이다. 대기업 부장들이 임원승진 가능성을 낮게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코노미21>이 대기업 부장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가운데 33명만이 임원승진 가능성을 ‘50% 이상’으로 예상했다. 반면 67명은 ‘40% 미만’으로 내다봤다. 심지어 ‘0%’라고 밝힌 응답자(2명)도 나왔다(파트5 참조).
이런 이유로 부장들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그래서 때론 동료도 때론 후배도 두렵다. 본지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기업 부장 100명 중 64%가 ‘후배들이 무섭다’고 답했다. ‘동기가 두렵다’고 말한 응답자도 59%에 달했다(파트3 참조). C그룹 ㄷ부장은 “주변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전락해 어렵다”고 말했다. D그룹 ㄹ부장은 아예 ‘자리보전’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만약 냉정한 경쟁에서 밀린다면? 남은 것은 퇴사뿐이다. 본지 설문조사 결과, 대기업 부장들이 ‘승진 여부’(17%) 보다 ‘퇴직 후 삶’(33.5%) ‘자녀교육 문제’(25%) 등을 더더욱 걱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쿠르트·잡코리아 등 취업포털사이트에 등록되는 대기업 부장들의 이력서수가 해마다 증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파트6 참조).
대기업 부장 스스로 ‘퇴직 후 제2의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인재추천 및 경력관리 전문기업 HRKorea와 스카우트에 따르면 2007년 대기업 부장 이력서 등록건수는 전년 대비 2배 남짓 증가했다. 온라인 리크루팅 기업 잡코리아에 등록된 부장급 이력서 또한 2006년 5924건에서 2007년 6227건으로 5%가량 늘었다.
전체 이력서 등록건수가 74만8499건(2006)에서 73만9574건(2007)으로 2.2%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 증가세다. 50대를 훌쩍 넘어선 E그룹 ㅁ부장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창업을 할 지 중소기업 임원으로 나갈지 고민 중이지만 뾰족한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475세대 늦깎이 부장들의 애환
이런 부장의 현주소에 대해 F그룹 ㅂ부장은 흥미로운 비유를 했다. “대기업 부장은 군대의 중령과 비슷한 것 같다. 중령이 그렇지 않은가? 군복을 벗느냐 남느냐…. 부장도 마찬가지다. 임원으로 승진하느냐 아니면 퇴직하느냐 갈림길에 서 있다.”
그래도 386세대에 속하는 젊은 부장들은 희망이 적지 않다. 임원승진 가능성은 크고, 퇴직할 날도 많이 남았다. 명예퇴직, 정리해고만 당하지 않으면 10년은 족히 버틸 수 있다. 문제는 475세대 ‘늦깎이’ 부장들이다. 평균 정년(54.1세)은 코앞에 있고, 임원행(行) 열차는 이미 떠나간 듯하다. 앞서 언급한 최 부장과 비슷한 신세다.
그래서일까. 최 부장은 요즘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475세대가 약진했다’라는 정치기사에 귀를 쫑긋 세운다. 혹여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바람에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퇴직바람’을 온몸으로 버텨야 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오륙도’라는 말이 남 일 같지 않은 요즘이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외환위기를 집념 하나로 극복한 중년층, 중산층의 어두운 현주소일지 모른다.
이윤찬 기자 chan4877@economy21.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