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문화의 양면성
[이학기 칼럼] 동아대학교 교수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1월에 ‘국가 브랜드 국민인식 제고 여론조사’의 결과를 발표했다.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외국인들이 한국이나 한국인에 대해 가질 것으로 생각되는 긍정적 이미지 1위는 ‘부지런하다’, 부정적 이미지 1위는 ‘빨리빨리’로 나타났다.
공모전 전문미디어 ‘씽굿’과 취업경력관리 포털 ‘스카우트’가 공동으로 대학생 및 직장인 720명을 대상으로 ‘2008년 대한민국 이미지’를 설문조사한 결과, 대한민국 대표이미지 1위로 ‘빨리빨리’(36.3%)가 선정됐다.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축복된 결혼식도 30분 이상을 넘지 않는다.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식이 늦게나오면 짜증스러워 한다. 맡겨진 일을 빨리 처리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가장 빨리 배우는 한국말 중에 하나가 ‘빨리빨리’이다.
한국인에게 ‘빨리빨리’는 삶의 행동철학이며, 하나의 생활문화로 고착화 된듯하다.
모든 사회현상에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빨리빨리’ 문화 역시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갖고 있다.
‘빨리빨리’ 문화가 갖는 긍정적 측면은 무엇일까? 정보화 시대에서 속도는 경쟁력의 핵심이다. 속도전에서 앞서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물리적 속도가 생명인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빨리빨리’ 문화에 내재된 정신적 속도의 덕이다.
한국이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나라로서 단기간에 압축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 역시 빠른 의사결정과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빨리빨리’ 문화의 추진력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긍정의 가치 이면에 부정적인 이미지도 만만치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빨리빨리’ 조급증이다. 각종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급행료’라는 것을 건네야 일이 빨리 처리되던 시절이 있었다. ‘빨리빨리’가 부패의 고리가 된 것이다.
90년대 초반에 일어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비롯하여 최근까지 일어난 각종 건설 부실공사가 또 하나의 사례이다. 절차와 시스템은 소홀히 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성과내기에 급급한 ‘빨리빨리’ 조급증이 낳은 결과이다. ‘빨리빨리’가 부실의 단추가 된 것이다.
‘빨리빨리’ 문화의 이러한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국민인식 조사결과에서 보듯이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빨리빨리’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 이유는 부패와 부실의 사회적 문제 발생의 주요인이 ‘빨리빨리’에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문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많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빨리빨리’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빨리빨리’ 조급증이 만연돼 있다. 사회적.정치적인 이해당사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절차와 조정의 가치를 생각하기보다는 속도전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증 조급증’에 감염돼 있는 것이다.
용산철거민 참사가 그렇고 2월 임시국회에서 쟁점법안의 처리를 둘러싼 선량들이 보여준 모습이 그랬다.
용산철거민 참사의 경우 참사발생 이전단계까지의 문제해결 과정에서 이해당사자들 간의 의견 조정과 소통을 위한 사회적 갈등관리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오직 농성하는 사람들을 ‘빨리빨리’ 해산해야 한다는 조급증만이 있었을 뿐이다.
국회의 쟁점법안 처리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쟁점법안일수록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국민 간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득과 소통의 정치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속전속결’ 처리의 속도전으로 나오는 여당과 이를 저지하겠다는 야당만이 있었을 뿐이다.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관객 200만을 돌파하는 공전의 히트작이 됐다. 이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유가 뭘까? 많은 영화평론가들은 ‘느림의 미학’, ‘느림의 소중함에 대한 새로운 발견’ 등으로 평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와 속도전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소가 상징하는 ‘느림의 가치’와 노인과 소의 관계를 통한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현재의 경제위기에 불안 해 하고 있다. 서민들은 하루하루의 삶이 힘겹기만 하다.
어렵고 힘겨운 상황일수록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빨리빨리’의 조급증도 ‘속전속결’의 속도전도 아니다. 가능성과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느림’은 미학이 아닐지라도 민주사회에선 때론 돌아가는 길이 지름길보다 빠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권력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고 국민과 소통하는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 
